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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포스팅한 것처럼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다녀왔다. 게르기예프의 지휘를 보는 것이 2006년 마린스키에서 본 이후 6년만이라 무척 반가웠다.

어제 마지막 곡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인 줄 알고 갔었는데 교향곡 5번이었다! 왜 착각을 하고 갔었지? 어쨌든 5번이라서 너무 좋았다. 쇼스타코비치까지 듣고 나서 휴식 시간에 아, 이제 그 우울한 비창이로구나 하며 들어갔었는데...

난 사실 클래식 음악은 막귀로 듣는 편이고 지식도 얕은 편이라 어느어느 지휘자, 어느어느 연주회 버전, 어느어느 오케스트라와 어느어느 음반 등등을 논하는 분들을 매우 부러워한다. 기껏해야 좋아하는 작곡가나 좋아하는 곡 연주가 있으면 들으러 가고 '아, 이 연주 템포와 스타일은 지난번 들은 ㅇㅇ랑 좀 다르네', '아, 이건 아주 멜로딕하게 연주하네', 혹은 '앗, 내가 아는 부분인데 삑사리가 났어, 박자가 빠졌어..' 정도 밖에 안된다. 그래도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면 오케스트라가 좀 후져도 들으러 갈 때가 많다.

클래식 연주회에 가기 시작한 것도,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도 발레와 마찬가지로 옛날 러시아에 갔을 때부터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홀에 자주 갔는데 당시엔 초심자답게 베토벤을 좋아했으므로 주로 그의 곡들을 들으러 갔다. 발레처럼 연주회 티켓도 쌌기 때문에 편하게 다녔다.

연극보다 발레를 좋아하듯 오페라보다는 교향곡 등 연주 음악을 더 좋아한다. 피아노보다는 관을 좋아하고 관보다는 현을 좋아한다. 현은 바이올린보다는 첼로를 좋아한다. 관은 오보에가 좋다. 피아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래도 어제 손열음 연주는 잘 들었다.

어제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는 거의 3시간을 꽉 채우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랴보프의 바바 야가, 손열음이 협주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번,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교향곡이 2개였다!!!! 티켓값이 비싸서 툴툴거리고 갔지만 돈이 아깝지 않았다.

러시아 작곡가의 곡은 역시 러시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때가 제일 감흥 좋게 들리는 건 나의 편향된 러시아 사랑 때문이겠지...?

연주회 끝나고 집에 오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돌아와서 쇼스타코비치 음악 듣다 잤다.

..

옛날에 너무 멋있어서 흠모했던 미중년의 게르기예프는 이제 전형적인 러시아 할아버지처럼 머리가 벗겨지고 늙어버렸지만 높은 단이 아니라 연주자들과 같은 높이의 무대 위에서 종횡으로 활보하며 지휘하는 모습에는 역시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고 리플렛이나 사진들을 보니 교묘하게 이마 위를 다 오려내 편집했더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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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에 넘어가 어제 음악당에서 판매하던 게르기예프 음반 중 세헤라자데 구입. 생각해보니 내가 갖고 있는 건 카라얀 버전인데 음질이 너무 별로였다. 세헤라자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발레이자 클래식 음악이다. 맨 처음 이 곡을 들었던 것도 역시 마린스키에 발레 보러 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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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연주회 가기 전에 룸메이트랑 게르기예프 얘기하다가..

나 : 이제 게르기예프 엄청 늙었어.. 살찌고 배나오고 머리 벗겨져서 슬퍼. 전에는 정말 내 타입이었는데.

룸메이트 : 그럼 이제 게르기예프 같은 사람이 꼬드기면 안 넘어가?

나 : 어... 넘어가... 게르기예프면 늙었어도 넘어갈 것 같아...

.. 난 아마 어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을 흠모하는 경향이 강한가보다. 아니면 게르기예프가 멋있어서 그런가, 벗겨진 머리 부분을 오려내 편집한사진을 보면 여전히 멋있긴 하다 :)

 

** 이제 마린스키 백조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오랜만에 게르기예프 연주를 봤더니 다시 러시아에 가서 일년만 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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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